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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과 불변에 연연하지 않는 진보적 정의론을 기조로 삼아야 한다

2019. 9. 11. 23:49이야기들/사회·문화 이야기

옛 공산주의의 대부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유물사관 등을 창안해 세계사의 흐름을 일종의 필연으로 분석하며 자본주의의 도래와 종말,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리라 주장했다. 한편 보다 최근의, 신자유주의의 대가로 잘 알려진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마르크스주의가 말하는 필연적 역사 변화가 완결되었음을, 그리하여 자본주의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의 시대가 영원불변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둘 모두 어느 정도 교양을 갖췄다면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사상들이다.

 

비록 시간대는 다르지만, 오랜 기간 많은 학자들은 이 대립된 두 주장에 대해 논쟁을 벌였으며 그 결과도 일정 부분 매듭지어졌다. 어느 쪽이 더 나은지 말하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 이미 의미도 없고 그저 진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다만 그 이론과는 별개로, 각 학자의 관점에 녹아있는 공통성은 지금도 충분히 흥미를 끌만한 부분이다. 어느 쪽이든 역사의 발전 양상에 있어 필연을 가정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역사를 종결시키는 불변이 존재한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불변은 세세한 변화의 수준이 아닌 커다란 맥락에서의 의미이다.

 

주제를 환기하는 의미에서 위의 이야기를 조금 더하자면, 저 두 거물들의 사상 관점은 모두 긴 논쟁을 거쳐 상당히 불완전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그 학자 스스로가 오류를 인정하고 자신의 이론을 철회해 역사적 흐름에 불변은 없고 변화가 반복된다는 관점으로 선회했다. 전자 또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이나 모순을 인식한 그 시대적 의미는 높은 평가를 받으나, 역사적 필연의 관점이나 그에 동원된 수치적 해석에 있어서는 오류를 지적하는 의견이 우세하다.

 

어떠한 사상의 필연과 불변을 주장하는 관점은 그 대상을 하나의 기계적 혹은 유기체적 체계로 생각하는 관념에서 시작된다. 기계적·유기체적으로 체계적인 방식을 공유한 상호작용이 사회를 움직인다고 믿고 있기에, 체계적인 작동으로부터 산출되는 필연을 연상하는 것이다. 한편, 필연에의 믿음은 그 흐름의 진행에 따라 최종 단계, 즉 불변의 상태를 가정하고 신앙하는 수준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이 신앙은, 특정 시공간의 특질에 기반했던 부분적 현상들을 전체 시공간을 관통하는 본질적 요소로 포장하는 수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허나 엄밀히 말해서 인간 사회는 어떠한 체계, 즉 기계적·유기체적으로 체계적인 방식을 공유한 상호작용이라 보기 어렵다. 분명 크고 작은 개별 주체들의 다중적이고 중첩된 상호작용의 네트워크이기는 하나, 기계적·유기체적으로 체계적 방식을 공유하는 수준까지는 아니다. 체계를 공유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별 주체들의 범주에서 끝이며 이것도 상대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러므로 사회의 변화는 어떠한 체계로서의 필연적 진행이라기보다는, 우발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실존의 연속에 더 가까운 것이다.

 

일례로 소련의 공산주의 혁명을 재조명해볼 수 있다. 소련의 시작점인 러시아 혁명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수 마르크스-레닌주의 운동가들의 주장과 달리, 마르크스주의적 혁명, 즉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 러시아 제국은 자본주의는커녕 산업화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의 모순이 아니라 그 이전 단계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지배 체제가 무너지는 혼란의 와중에 당대의 크고 작은 특성 요인들이 모여 일어난 우발적 사태이다. 이 점은 중국도 비슷하다.

 

봉건 경제가 중상주의로, 중상주의가 자본주의로 변화한 것은 필연적 변화라기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우발적 흐름이었다. 공산주의 혁명 역시 우발 사태였으나, 평시의 상황이 아닌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기반한 사건이었기에 의미있는 파문을 일으켰을 뿐 커다란 흐름이 되지는 못한 채 종막을 맞았다. 즉, 자본주의가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붕괴해서 필연적으로 혁명이 일어난다는 예견 따위는 너무나도 낙관적인 환상일 뿐이다. 필연과 불변 모두 허상일 뿐, 실존하는 이 세상은 변화가 또 다른 변화로 귀결되는 우연의 연속선이다. 

 

소련을 시작으로 했던 소비에트 공산주의 혁명이 종말을 맞은 것도, 하나의 특이 상황에 기반한 우발적 변화가 우발적 귀결을 통해 세계적 평균의 흐름으로 돌아간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기반의 자유민주주의 또한 우연으로 이루어진 인류사에 있어 현재 평균치에 해당하는 체제일 뿐, 불변하거나 필연적인 무언가는 절대 아니다. 몇 번의 위기 앞에 조금씩 모습을 바꿔 아직까지 근근히 이어지고는 있지만, 앞으로의 우발적 흐름에 따라 점진적으로 혹은 급진적으로 형태를 바꿀 것이고 상황에 따라 언젠가는 그 맥락과 이름까지 달리하게 될 시대로 치닫을 가능성도 높다.

 

그런 점에서, 이미 그 역할을 다한 마르크스-레닌주의에만 자꾸 몰두하여 현실을 외면하는 극소수는 말할 것도 없으나, 현재 한국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는 자칭 우파들의 사상적 견해를 보면 더욱 한심한 작태들이 많다. 저자 스스로가 철회하고 폐기한 신자유주의의 어느 유명 이론을 붙들고 큰소리 치면서 옛 소중화 사상을 연상케 하는 자들,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한다면서도 정작 그 비판의 이론적 토대는커녕 사실 관계조차 제대로 몰라 왜곡하고 악의적으로 창작해, 심지어는 그 거짓과 부조리를 합리화한답시고 끝없는 궤변을 늘어놓고 일부는 매국 행위까지 서슴치않는 자들이 주류에 떡하니 앉아 필연과 불변의 진리까지 자칭하며 세를 모으고 있다.

 

그러나 지지하는 이념이나 사상과 관계없이, 오늘날의 과학적 세계관을 가진 이들에게 있어 필연과 불변이라는 사상적 관점은 매우 불편한 것이다. 그것은 과학적이라기보다 종교적인 개념에 가깝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체계라 부를만한 것은 자연적·인위적 실체 뿐, 인간 사회의 애매하기만 한 그것은 체계라기보다는 오히려 카오스에 가까우며, 다만 어느 정도 제약이 가해진 상태, 즉 통제된 카오스인 것이다. 현재 위정자나 부르주아들이 쥐고 있는 고삐, 즉 제도가 바로 그 통제력이다. 당연히, 우연에 대한 통제력을 너무 과신하면 반드시 사달이 나게 되어 있다. 통제되지 않거나 통제에 실패한 카오스의 귀결은 똑같이 재앙일 뿐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 사고의 연속이 바로 우발적 역사 흐름의 전환점들일지도 모를 일이다.

 

역사상 있었던 사회 체제들은 모두 우발적 흐름을 통해 자리를 잡았음에도 시기가 지남에 따라 필연과 불변을 고집하는 상태로 고착화되어 왔다. 이것이 바로 보수화이며, 보수 체제의 본질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그 틀을 통해 당대 보수 체제의 허를 찔렀지만, 바로 그렇기에 또한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또 그 그림자에선 소위 자유의지주의라고 불리는 통제 거부의 이념, 거시경제이론적 의미는 없지 않으나 종국은 사고를 정지해 통제 없는 야만의 시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자기부정적 사상마저 불변의 진리를 자칭하며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 토대에서 나온 제도가 오래갈 리 만무함은 자명한 일이다.

 

어느 사상 체계를 고집하든 결국 우발적 흐름은 막을 수 없으며 대세적 변화에 끌려가게 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연성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에 맞춘 유연한 방법론을 개발하여 꾸준히 적응하며 나아지게끔 사회 정책·제도를 제안하고 입각시키는 것이 현대 사회 진보의 주된 과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남은 진보 세력은 마르크스주의의 알맹이를 취하면서도 옛 껍질을 벗어 이러한 우발적 세계관의 주된 흐름에서 바람직한 미래상과 적절한 통제 균형을 개척해 사회적 복지와 성장 및 분배적 정의를 확보하는, 사회주의부터 급진적 자유주의의 요소까지 가능한 선택지를 모두 활용해서라도, 지속 조정에 용이한 구성론적·상대론적·정의론적 관점에서의 구체성 있는 방안을 면밀히 사회에 제시하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